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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은 지증왕 때 일이다.지증왕 4년(503)에 국호와 왕호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 왕호와 국호의 제정을 통해서 신라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 조직을 강화해 나감에 따라 요정되는 선진적인 중국식 정치 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라고 하는 지등왕때의 개혁 방향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지증왕 6년에는 주군제라고 하는 신라의 지방제도가 만들어 졌다. 이때의 주군제는 군사상 필요에 따라서 때때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갖는 것이는 했지만 점령지 확보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법흥왕때는 이러한 지증왕 때의 업적들을 토대로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병부를 설치하였다. 신라 군사제도의 본격적인 정비는 진흥왕 때라고는 하나 군사 제도 정비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이때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는 군대 동원에 있어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로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국적인 규모의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군사 제도의 개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병부의 설치는 군정과 군영을 분리시킴으로 인해 연맹단계 이래의 병권의 분산성을 극복하고 이를 왕권에종속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①]. 병부의 설치는 율령반포와 함께 전국적인 군사력 동원을 이뤄 이후 비약적 영토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법흥왕 18년(531)에는 상대등이라는 관직이 설치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 관직이며 신라 귀족의 대표적 존재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이 귀족회의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 감에 따라 왕의 밑에서 귀족들은 거느리는 지위였다. 그러므로 상대등은 귀족들의 대표자이면서 동시에 강화된 왕권과도 조화되는 독특한 관직이었다. 이러한 상대등의 설치는 이전시기보다 강력해진 왕권을 시사한다고 했다. 다음으로 법흥왕 23년(536)에는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웠다. 이 시기는 이미 율령이 반포된 후의 시기이며, 더불어 불교의 공인도 이루어진 다음의 시기이다. 그러한 시기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가 대내적으로는 왕권이 확립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왕실은 자기의 이익을 달성하고 싶으면 꼭 어떤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왕실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로 인해 불교가 통치 수단으로서 존재했다. 그리고 불교는 확실히 이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통치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등 여럿 방면에 공헌을 했다. 불교는 종교로서의 이념과 의식만을 들고 온 것이 아니라 신라에 음악, 미술, 공예, 의학 등을 전달하였고, 중국문화 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앙아 시아의 문화까지 소개하여 한국의 고대문화 창조에 큰 공헌을 하였다. 불상, 탑파, 조각 등의 예술발전과 불경의 간행을 통한 목판인쇄술의 발전은 특기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며, 한국의 국보가 거의 삼국시대의 불교문화재라는 사실은 이를 입증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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